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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국보1호 숭례문

우리나라 국보 1호 숭례문은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 40에 위치해 있다. 1962년 12월 20에 지정되었으며, 건축시기는 1398년이다. 정식 명칭은 숭례문이지만 한양도성의 남쪽에 위치하였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렸다. 1396년 태조 5년에 짓기 시작하여 1398년에 완성되었다. 

 

경복궁의 남쪽에 위치한 한양도성의 정문으로 교통의 요지로서 역할을 수행해 왔다. 숭례문은 서울시로 들어서는 길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청계천, 동남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있다. 우리나라의 국보 1호 답게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어디서든 숭례문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숭례문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에 남아 있다. 조선의 개국과 함께 건축 된 숭례문은 이후 세종과 성종대에 큰 수리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전차선로의 개설을 위하여 숭례문과 연결되어 있던 좌우 성벽을 철거하였다. 

 

숭례문 주변으로 성곽유적과 경복궁이 있다. 성곽의 경우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어 거의 남아있지 않으나 숭례문을 포함한 4대문(숭례문, 돈의문, 숙정문, 흥인지문)과 4소문(광화문, 창의문, 소의문, 혜화문)이 있었으나 현재 돈의문, 소의문은 남아있지 않다. 

숭례문의 역사와 특징

숭례문은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서울에 입성할 때 거쳐온 곳이라 전해져, 조선총독부는 숭례문을 보물 1호로 지정했다. 이 같은 조치를 두고 왜군의 한양입성을 기념하기 위해 지정하였다는 설도 있다. 그래서 숭례문이 우리나라 국보 1호로 적합하냐는 논쟁은 끝이지 않고 있다. 

 

해방 후 국보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가 있었지만 숭례문으로 시작하는 국보의 번호 체계는 일제강점기의 틀을 유지하고 있다.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국보 1호 교체가 추진된적이 있지만 문화재위원회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되었다. 또 최근 들어 숭례문의 화재 및 부실 복구로 대표성을 상실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숭례문이 우리나라 국보 1호로 자리잡고 있는 이유는 그 상징성 때문이다. 숭례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 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한 우진각 지붕을 하고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윗 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그 형태가 곡선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견고하여 조선 전기의 목조건물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봉유설>에 따르면 숭례문의 현판은 양녕대군이 썼다고 전해진다. 

 

숭례문 화재사건 그리고 복원

국보 1호 숭례문은 2008년 방화사건에 의해 소실되었다가 2013년 복원되었다. 범인은 당시 60대 남성으로 택지개발에 따른 토지 보상액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었다. 같은 이유로 2006년 창경궁에 불을 질러 집행유예와 벌금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 원래는 종묘에 불을 지르려 했는데 경비가 삼엄하여 숭례문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숭례문을 화재로 전소시킨 범인은 문화재보호법 위반으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범인이 불을 지른 후 화재 신고가 접수되었지만 진화과정은 상당히 비효율적이었다. 가장 큰 이유로 소방인력들이 목조 건축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소방차 32대로 물을 뿌려가며 진화를 했지만 지붕이 완전 방수라 내부의 불은 잡을 수 없었다. 목조건축물은 나무가 물에 닿으면 썩기때문에 지붕 방수에 엄청난 공을 들인 게, 화재진압에는 화근이 된 것이다. 전문가들은 기와를 걷거나 구멍을 뚫어 불을 꺼야 했다고 지적했지만, 당시 소방인력 곁에는 전문가가 아무도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한 노인에 의해 국보 1호가 전소되었다. 정부는 숭례문의 상징성 때문인지 국보 지위에서 박탈하지는 않았다. 화재로 2층은 대부분 전소되었지만, 다행히 1층 누각은 구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양녕대군이 썼다고 전해지는 현판은 토으로 절단하여 약간 파손되는 선에서 지켜낼 수 있었다. 

 

전소 이후 복원과정에서도 말이 많았던 숭례문이다. 복구공사가 전통적인 방법이 아니었다는 감사 결과도 있고, 복원에 쓰인 안료가 일본산이라 더더욱 논란을 가중시켰다. 이 일로 당시 문화재청장인 유홍준은 자리를 내놔야 했고, 외신들도 대한민국 국보의 화재 사건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결과적으로 숭례문은 전소되었다가 다시 복원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나라 국보 1호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번호는 별 의미가 없다고는 하지만, 아픈 역사를 간직한채 다시 자리를 잡고 서울의 중심부를 지키고 있는 숭례문이다. 복원 과정에서 논란이 많았지만, 숭례문이 국보로서 가지는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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