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2호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 |
대한민국 국보 2호인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서울 종로구에 위치해 있다. 원각사는 종로구에 위치했던 절의 이름으로,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 원각사의 원래 명칭은 흥복사로 조선 태조가 한양에 수도를 정할 때 조계종의 본사 역할을 했던 곳으로, 국가에서 주관하는 각종 행사를 열었던 곳이다.
하지만 세종 이후 불교 종파를 통합하고 사찰로서의 명맥이 끊어져 일부가 빈민구제소인 진제소 등 국가 공관으로 이용되었다. 1464년 중건하여 원각사가 되었는데, 본당인 대광명전을 중앙에 두고 왼쪽에는 선당을 두었다. 문으로는 적광지문, 반야문, 해탈문 등이 있었다.
세조는 둘째 큰아버지이인 효령대군이 양주 회암사에서 원각법회를 열었는데, 법회 도중 여래가 나타나 사리를 내려주면서 절의 창견을 예언했다고 한다. 효령대군이 사리를 세조에게 보이고 함께 예불을 드리자 사리가 400여 개로 나뉘어 흥복사 터에 원각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원각사의 창건은 효령대군과 세종의 아들인 임영대군, 영웅대군, 신숙주 등이 담당하였다. 1465년 4월 초파일에 절의 낙성 경찬회가 베풀어졌는데, 승려 128명이 참석하여 번역한 <원각경>을 독경하였고, 승려 2만 명에 공양을 하였다고 전해질 정도로 유서가 깊은 절이다.
원각사지 십층석탑의 특징 |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높이 12m로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대리석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탑 소재다. 기단은 3단으로 되어 있고, 표면에는 용, 사자, 연꽃, 불상, 보살상 등을 조각하였다. 전체적인 형태와 양식이 고려시대 경천사지 십층석탑과 매우 유사하다. 탑을 만들 때 사리공안에 <원각경>과 사리를 넣었다.
탑신부는 10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亞자 모양을 하고 있고, 4층부터는 정사격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각층마다 목조건축을 모방하여 지붕, 공포(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에 얹는 부재), 기둥 등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우리나라 석탑중 가장 후대에 속하지만 그 형태와 평면이 특수하며 수법이 세련되어, 조선시대 석탑으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최고의 걸작이라 평가받는다. 석탑의 구성은 일반형 석탑의 조형과 같이 기단 부위에 탑신과 상륜부가 놓여 있다.
기단부는 3층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면석에는 천태만상의 조각으로 장식되었다. 옥개석은 각 층마다 팔작지붕을 하였고 하면에 두공을 모각하였는데 지붕의 기와골 등 모두 목조건축의 옥개를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 석탑을 대리석으로 만든 것은 고려시대 경천사 십층석탑과 유사하다.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경천사 십층석탑은 대리석이라는 희귀한 재료로 만들어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 기단부 부터 탑신부 3층까지의 평면, 4층 이상의 평면 등이 모두 같다. 그리고 기단부 부터 탑신부에 이르는 각 면의 조각도 매우 흡사하다. 이러한 점에서 원각사 탑 건립을 경천사 탑과 거의 같은 시기로 추정하기도 한다.
원각사지 십층석탑의 역사적 의미 |
서울의 중심부에 우뚝 서있는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우리나라 석탑의 역사를 조망할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조선시대 불교정책은 물론 일제시대 3·1 운동의 진원지였던 탑골공원이 담은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일제시대에는 원각사지 십층 석탑이 있어 파고다공원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현재는 산성비로 인한 훼손을 막기위해 유리 보호 각안에 보관되어 있다. 일제시대에는 탑골공원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자 이에 대한 복수로 탑을 파괴하고 반출을 시도한 사건이 있었다고 하는데 사실여부는 알 수 없다. 그만큼 우리나라 국민들의 애환이 담겨있는 문화재다.
사실 탑은 불교에서 기원한 것으로 원래는 무덤의 성격이 강하였다. 불교가 전파되면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곳으로 추앙받았고, 신도들이 의식을 치르고 모시는 상징적인 역할도 했다. 탑 내부에는 부처님의 사리를 비롯해 다양한 경전을 모시는 등 사리장엄구는 당시의 불교 수준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기도 하다.
삼국시대 신라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황룡사탑은 목조건축이었고, 경주에 남아 있는 분황사지모전석탑은 벽돌로 만들었다. 현재 남아 있는 대부분의 탑들을 보면 기둥을 조각해 둔 걸 확인할 수 있다. 원래 목조건축에서 석조건축으로 바뀌면서 기존의 건축양식을 모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원각사지 십층석탑이 위치했던 원각사는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 국가에서 관장하던 행사를 치르던 주요 사찰이었다. 조선의 억불정책으로 대부분의 절들이 산속으로 숨은데 반해 원각사가 서울 중심부에 위치했던 것은 그만큼 국가의 주요 사찰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우뚝 서 있던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우리나라 석탑 양식의 진수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문화재다.
참고자료
문화재관리국, 1993, 원각사지십층석탑 실측조사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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