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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태조(1392~1398) 2대 정종(1398~1400) 3대 태종(1400~1422)

조선 1대 왕 태조(이성계)는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를 전복시키고 조선을 개국하였다. 막강한 권력으로 전제개혁을 실행했고, 신진세력을 앞세워 한양으로 도읍을 옮겨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사대주의, 배불숭유, 농본주의를 조선의 근본 정책으로 삼았고, 관제의 정비, 병제와 전제의 재조정을 통해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2대 정종은 태조의 둘째 아들로, 태조의 뒤를 이어 왕위를 물려받았다. 하지만 한양에서 일어난 제1차 왕자의 난을 피해 개경으로 몸을 피했었다. 제2차 왕자의 난 이후 동생 이방원을 왕세자로 삼았고, 그의 뜻에 따라 사병제를 폐지하여 삼군부에 편입시켜 지방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3대 태종은 이성계의 다섯번째 아들로 정몽주를 제거하여 신진 세력의 기반을 다졌다. 이성계가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정도전남은을 죽이고, 세자마저 살해한다. 이후 정조에게 양위를 받아 왕위에 등극하였다. 즉위 후 사병을 혁파하고 문하부를 폐지하였으며, 의정부를 설치하였으며 억불숭유 정책을 강화하였다.

4대 세종(1418~1450) 5대 문종(1450~1452) 6대 단종(1452~1455)

4대 세종은 태종에게 왕위를 양위받아 즉위하였고, 태종은 4년간 상왕으로 생존하며 영향력을 과시했다. 집현전을 왕립 학술기관으로 삼고,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세종대에 이르러 강압적 왕권과 훈신세력이 자취를 감추고 유가적 소양을 지닌 국왕으로 민족문화를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태평성대를 열었다.

 

5대 문종은 세종의 맏아들로 학문을 즐기고 인품이 훌륭한 왕이었다. 세자시절 문무관리를 고루 등용하고 민정 파악에 힘쓰며 세종을 보좌했다. 병제를 정비하여 3군의 12사를 5사로 줄였으나 병력을 증대시키고 병종을 5사에 배분하였다. 다만 몸이 약하여 재위 2년 4개월 만에 병사하였다.

 

 

6대 단종은 12살의 어린나이에 즉위하였다. 병약했던 문종은 황보인김종서에게 어린 단종의 보필을 맡겼다. 하지만 수양대군에게 황보인과 김종서가 제거당했고, 단종은 허울뿐인 왕으로 전락했다. 이후 한명회와 권람이 나서 단종을 핍박했고 결국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단종은 끈질긴 자살을 강요당하여 결국 영월에서 생을 마감했다. 

7대 세조(1455~1468) 8대 예종(1468~1469) 9대 성종(1469~1494)

7대 세조는 세종의 둘째 아들이다. 무예에 능하고 병법에 밝았다고 한다. 즉위 후 군권을 장악하고 집현전으로 하여금 본인을 찬양하는 교서를 만들게 하였다. 6조의 직계제를 부활시켜 왕권을 강화하고, 호적, 호패제 및 진관체제를 실시하여 군제를 정비하였다. 

 

8대 예종은 어린나이에 즉위했지만 법치주의에 입각한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였다. 훈구파 세력과 대립하여 개혁정책을 밀어붙였으나 신숙주와 한명회의 견제를 받았고, 모친 정희왕후마저 예종에게 등을 돌렸다. 예종은 즉위 후 13개월 만에 사망하였는데, 훈구파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다.

 

9대 성종은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즐겼고, 서화와 사냥에도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 예종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정희왕후, 신숙주, 한명회 등 훈구파의 추대로 왕이 되었다. 성종은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김종직, 김굉필 등 사림 세력을 등용하고, 홍문관을 예문관에서 분리하여 왕권을 호위하는 정치기구로 만드는 등 왕권 강화의 초석을 다졌다. 

10대 연산군(1494~1506) 11대 중종(1506~1544) 12대 인종(1544~1545)

10대 연산군은 성종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다만 어머니는 후궁 출신이었다. 왕이 된 후 선왕의 명복을 비는 행사와 외척의 등용을 두고 삼사(사간원, 사헌분, 홍문관)의 유생들과 갈등을 빚었고 결국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연산군은 사냥과 사치로 국고를 낭비하였고, 결국에는 성희안과 박원종이 주도한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도로 쫓겨나 사망하였다.

 

11대 중종은 성종의 둘째아들로 연산군의 이복동생이다. 중종은 조광조를 필두로 한 신진사류와 개혁을 추진했으나 훈구파가 일으킨 기묘사화로 조광조 무리는 숙청당했다. 미신을 타파하기 위해 소격서를 폐지하고 현량과를 실시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다. 또 중종 시기에 <경국대전> <천하여지도>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이 편찬되었다. 

 

12대 인종은 중종의 맏아들이다. 즉위 후 기묘사화로 폐지되었던 현량과를 부활시켰고, 개혁정치를 추구하였다. 하지만 문정왕후와의 권력다툼이 심화되고 병약하여 즉위 9개월 만에 사망하였다. 조선 왕 중 재위기간이 가장 짧다. 

13대 명종(1545~1567) 14대 선조(1567~1608) 15대 광해군(1608~1623)

13대 명종은 인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12살의 나이에 즉위하였고,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문정왕후의 권세를 비난하는 양재역벽서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핑계로 반대하는 무리를 모두 숙청하였다. 외척이 권세를 잡아 민심이 횡횡해져 백정 출신 임꺽정이 기치를 세웠고, 왜구가 출몰하는 등 정세가 어지러웠다. 문정왕후가 죽고 명종은 직접 정치를 주도하였으나 3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4대 선조는 중종의 손자다. 명종이 후사가 없이 사망하자 16세에 왕위에 올랐다. 선조가 왕위에 오른 후 그의 아버지가 대원군으로 봉해지며 조선에서 처음으로 대원군제도가 시행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후 한양을 떠나 의주까지 피난하였으며, 명나라의 구원으로 왜군을 격퇴하였다. 

 

 

15대 광해군은 선조의 둘째아들이다. 임잰왜란 발생 후 국난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피난지 평양에서 세자로 책봉되었다. 즉위 후 갈등을 빚었던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삼았고 인목대비를 유폐시켰다. 광해군은 후금과 명나라 사이의 전쟁에서 중립외교를 펼쳤고, 일본과 기유약조를 체결하여 외교를 재개하였다. 하지만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어 제주도에서 사망하였다.

16대 인조(1623~1649) 17대 효종(1649~1659) 18대 현종(1659~1674)

16대 인조는 김류, 이괄 등 서인(西人)의 반정으로 왕이 되었다. 1624년 이괄의 난으로 한양이 점령당하자 공주로 피난하였다가 도원수 장만이 이를 격파한 후 복귀하였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버리고 반금친명 정책을 펼치다 후금의 침입으로 정묘호란병자호란을 겪었다. 이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혀가는 치욕을 당했다.

 

17대 효종은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서 8년간 볼모생활을 하였다. 효종은 청나라에 대한 원한을 품고 북벌 계획을 수립하여 군사훈련을 강화하였다. 제주도에 표류한 네덜란드인 하멜로부터 서양식 무기 제조법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내부적으로 북벌에 반대하는 세력과 부딪히고, 청나라의 국력이 더욱 커져 결국 뜻을 펼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18대 현종은 아버지 효종의 상례를 두고 대치하는 남인(3년설)과 서인(1년 설) 중 서인을 채택하여, 서인이 권력을 잡게 되었다. 이후 인선왕후가 죽자 다시 복상 문제가 일어나, 이번에는 남인을 채택하여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후 서인과 남인은 당쟁이 심화되어 국력이 쇠퇴하였다. 

 

19대 숙종(1674~1720) 20대 경종(1720~1724) 21대 영조(1724~1776)

19대 숙종대동법을 실시하여 큰 효과를 거두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어지러웠던 토지사업을 정비하였다. 주전을 실시하여 상평통보를 주조해 중앙관청 및 지방관청에서 통용시켰다. 영토 회복을 추진하였고, 금위영을 설치하여 5 영체재를 완성하였다. 

 

20대 경종은 숙종과 장희빈의 아들로 태어났다. 재위기간 동안 노론과 소론의 당쟁이 심화되었고, 경종은 병약하여 이복동생인 연잉군(영조)을 세제로 책봉하였다. 노론의 압박으로 왕위에 큰 위협을 받았으나 소론의 지지로 노론 세력을 숙청한 신임사화가 발발되기도 하였다.

 

21대 영조탕평책을 실시하여 당쟁으로 인한 붕당의 대립을 완화하였다. 또 사치풍조를 조장하는 행위를 금하였고, <농가집성>을 보급하고 균역법을 시행하였다. 더불어 청계천을 준설하고 신문고를 설치하는 등 큰 업적을 남겼다. 다만 세자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경계심으로 뒤주 속에 가두어 죽이는 참사를 빚기도 하였다.

22대 정조(1776~1800) 23대 순조(1800~1834) 24대 헌종(1834~1849)

22대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로 노쇠한 영조를 대신하여 왕이되었다. 영조의 탕평론을 이어받아 왕권을 강화시켰고, 정약용을 등용해 화성을 축조하였다. 민생안정과 제도를 정비하기 위해 금난전권을 폐지하고 <대전통편> <탁지지> 등을 편찬하였다. 

 

23대 순조는 문효세자가 일찍 사망해, 11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과 김관주, 심환지 등의 벽파가 정치를 주도하였으나, 친정을 시작한 후 이들 세력을 축출하였다. 암행어사 파견, 친위부대 강화 등 왕권 강화를 도모하였으나 세도정치와 홍경래의 난에 부딪혀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24대 헌종은 안동김씨와 풍양조씨의 치열한 다툼으로 정치가 혼란하였고, 천주교 신자를 학살(기해박해)하여 이양선이 해안에 나타나는 등 민심이 동요하였다. 삼정의 문란과 국정의 혼란이 가중되었으나, <동국사략> <삼조보감> 등이 편찬되었고, 각 도에 제방을 쌓아 농업을 진흥시킨 치적도 있다.

25대 철종(1849~1863) 26대 고종(1863~1907) 27대 순종(1907~1910)

25대 철종은 형인 회평군이 옥사를 당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순원왕후의 명으로 궁으로 복귀해 왕으로 즉위하였다. 즉위 후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안동김씨세도정치가 극에 달했다. 1852년 친정을 시작하였지만 정치에 어둡고, 삼정의 문란으로 전국에서 대규모 민란이 일어났다. 또 최제우를 중심으로 동학사상이 백성들에게 퍼졌고, 만민평등을 주장하는 천주교도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26대 고종은 조선의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다. 명성왕후흥선대원군의 치열한 권력다툼 속에서 일본, 러시아, 중국 등의 내정 간섭을 겪었다. 고종 재임 당시 개화파와 수구파가 극렬하게 대립하였고 병자수호조약 등이 이루어졌다. 일본의 협박으로 황태자(순종)에게 양위한 후 덕수궁에서 만년을 보내다 1919년 사망하였다.

 

27대 순종은 고종의 둘째 아들로,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다. 한일신협약을 체결하여 정치를 일본인에게 넘어갔고, 일본의 압력으로 군대를 해산하였다. 더불어 경제권, 경찰권 등을 상실하여 1910년 경술국치와 함께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이후 순종은 창덕궁에서 머물다 1926년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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